2009년 01월 31일
"진화론을 믿습니까?"에 대답하기, 등.
엠바고 풀렸다.

태우지 말걸.
딥심플리시티(다음 책정보)를 읽고 쓴 에세이에서 발췌.
1. "진화론을 믿습니까?"에 대답하기
2009년은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자 종의 기원 출간의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중세 유럽인들에게 도서의 보급을 가능케 해 그들의 정신을 해방시켰다면, 찰스 다윈을 비롯한 진화학자들은 ‘만물이 신의 창조물이고 신의 창조 섭리에 의해 설계되어있다’는 전제 하에 과학과 과학자를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들러리 역할에 지나지 않게 했던 전통적 종교적 교조주의로부터 세계인의 지성을 해방시켰다. 나는 관찰된 풍부한 증거들과 사실, 그리고 반증되지 않은 이론으로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바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종교적 토론이나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흔히들 “진화론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고는 한다. 진화론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창조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은 성립하지만 전자의 진화론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진화에 대한 증거들과 관찰 결과들을 믿느냐고 굳이 묻고 싶다면 질문은 “당신이 보는 세상을 믿습니까?”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 지식의 역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 위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200여 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해온 “종교적 해석으로부터의 해방”의 시계를 되돌려 놓는 “진화론을 믿습니까?”와 같은 질문에는 그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답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종교에게, 사실은 과학이 다루도록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진화의 심오한 단순성
진화의 과정은 단순한 ‘최적자의 생존’이라는 간편한 단어이자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널리 퍼져 있는 단어인 ‘적자생존’이라는 단어가 강한 것만이 살아남고 살아남은 것이 강하다는 순환논리를 연상시키고 강한 것이 어떤 개체 혹은 종이 다른 종에 비해 더 우월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차별적인 생존 및 번식률’이라고 한다면 더욱 적합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체가 주어진 환경 하에서 얼마나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바로 진화론이 가진 자연세계에 대한 설명력이며, 그 원칙은 단순하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진화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점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제목 대로 개체들의 무리인 ‘종’의 단위에서 일어나는 선택을 이야기 했다면 도킨스는 유전자의 이기적 행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유전자는 자신의 단위를 남기고 싶은 ‘이기적인’ 방향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적인 행동 방향이 개체 수준에서는 ‘이타적인’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심오한 단순성이 의미하는 적절한 예가 아닐까 싶다. 단순한 원칙 하에 행동하는 개체들의 행동이 개체 수준에서 관찰할 때에 이해하기 힘들거나 예측하기 힘든 복잡한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3. 우리 사회에서 복잡계이론이 가지는 의미
그렇다면 카오스 이론이 가지는 지위는 무엇이 되는가? 과학 연구소를 나와 사회에 적용할 때에 결국 단순한 원칙과 초기의 변화가 끼치는 파급의 효과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카오스 이론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나는 과거에 이러한 의문을 정치학, 혹은 사회과학적인 이슈에서 “게임이론” 혹은 “네트워크/복잡계이론” 등을 논하는 자리에서 가진 일이 있다. 하지만 단순한 원칙과 인과관계의 법칙이 작동하는 수준과 그것이 미치는 파급효과를 아는 것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더욱 풍부한 설명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카오스 이론이 주는 함의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때로 사회적 이슈를 다룰 때 있어 쉽게 “대안”을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내가 가졌던 질문도 바로 그러한 경향에 의해 일었던 것이고, 최근의 ‘미네르바’가 이슈화 된 것도 바로 그러한 기대에서이다. 사람들은 ‘간단한 예측’을 제시할 점쟁이에 열광하지 ‘간단한 원칙’을 설명하고 그 원칙들이 복잡한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상호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진짜 학자들에게 열광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를 해석하는 힘은 바로 단순한 원칙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나온다. 예전에는 예측과 원칙에 대한 정의의 주도권을 종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현재에는 종교에 더해 각종 비과학적인 텍스트들이 난립하며 우리는 그것을 구분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사회 이슈에 있어서도 과학적인 사고와 방법론에 의거하여 사고하는 태도를 가질 것, 그리고 그 태도를 견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과학 교양,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존중이다.

태우지 말걸.
딥심플리시티(다음 책정보)를 읽고 쓴 에세이에서 발췌.
1. "진화론을 믿습니까?"에 대답하기
2009년은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자 종의 기원 출간의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이 중세 유럽인들에게 도서의 보급을 가능케 해 그들의 정신을 해방시켰다면, 찰스 다윈을 비롯한 진화학자들은 ‘만물이 신의 창조물이고 신의 창조 섭리에 의해 설계되어있다’는 전제 하에 과학과 과학자를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들러리 역할에 지나지 않게 했던 전통적 종교적 교조주의로부터 세계인의 지성을 해방시켰다. 나는 관찰된 풍부한 증거들과 사실, 그리고 반증되지 않은 이론으로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바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종교적 토론이나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흔히들 “진화론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고는 한다. 진화론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창조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은 성립하지만 전자의 진화론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진화에 대한 증거들과 관찰 결과들을 믿느냐고 굳이 묻고 싶다면 질문은 “당신이 보는 세상을 믿습니까?”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 지식의 역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 위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200여 년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해온 “종교적 해석으로부터의 해방”의 시계를 되돌려 놓는 “진화론을 믿습니까?”와 같은 질문에는 그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답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종교에게, 사실은 과학이 다루도록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진화의 심오한 단순성
진화의 과정은 단순한 ‘최적자의 생존’이라는 간편한 단어이자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널리 퍼져 있는 단어인 ‘적자생존’이라는 단어가 강한 것만이 살아남고 살아남은 것이 강하다는 순환논리를 연상시키고 강한 것이 어떤 개체 혹은 종이 다른 종에 비해 더 우월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차별적인 생존 및 번식률’이라고 한다면 더욱 적합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체가 주어진 환경 하에서 얼마나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바로 진화론이 가진 자연세계에 대한 설명력이며, 그 원칙은 단순하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진화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점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제목 대로 개체들의 무리인 ‘종’의 단위에서 일어나는 선택을 이야기 했다면 도킨스는 유전자의 이기적 행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유전자는 자신의 단위를 남기고 싶은 ‘이기적인’ 방향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적인 행동 방향이 개체 수준에서는 ‘이타적인’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심오한 단순성이 의미하는 적절한 예가 아닐까 싶다. 단순한 원칙 하에 행동하는 개체들의 행동이 개체 수준에서 관찰할 때에 이해하기 힘들거나 예측하기 힘든 복잡한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3. 우리 사회에서 복잡계이론이 가지는 의미
그렇다면 카오스 이론이 가지는 지위는 무엇이 되는가? 과학 연구소를 나와 사회에 적용할 때에 결국 단순한 원칙과 초기의 변화가 끼치는 파급의 효과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카오스 이론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나는 과거에 이러한 의문을 정치학, 혹은 사회과학적인 이슈에서 “게임이론” 혹은 “네트워크/복잡계이론” 등을 논하는 자리에서 가진 일이 있다. 하지만 단순한 원칙과 인과관계의 법칙이 작동하는 수준과 그것이 미치는 파급효과를 아는 것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더욱 풍부한 설명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카오스 이론이 주는 함의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때로 사회적 이슈를 다룰 때 있어 쉽게 “대안”을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내가 가졌던 질문도 바로 그러한 경향에 의해 일었던 것이고, 최근의 ‘미네르바’가 이슈화 된 것도 바로 그러한 기대에서이다. 사람들은 ‘간단한 예측’을 제시할 점쟁이에 열광하지 ‘간단한 원칙’을 설명하고 그 원칙들이 복잡한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상호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진짜 학자들에게 열광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를 해석하는 힘은 바로 단순한 원칙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 나온다. 예전에는 예측과 원칙에 대한 정의의 주도권을 종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현재에는 종교에 더해 각종 비과학적인 텍스트들이 난립하며 우리는 그것을 구분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사회 이슈에 있어서도 과학적인 사고와 방법론에 의거하여 사고하는 태도를 가질 것, 그리고 그 태도를 견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과학 교양,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존중이다.
# by | 2009/01/31 00:06 | note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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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미국 목사들의 진화론 찬성 서명
미국 기독교 성직자 서신 - 종교와 과학에 관한 공개서한 기독교 신앙인 사회에는 성서를 해석하는 적절한 방법을 포함한 여러 논쟁과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사실상 모든 기독교인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믿음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 권세를 부여합니다만, 대다수는 과학책을 읽는 것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지는 않습니다. 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와 방주 등과 같은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은 하나님, 인간,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에 대한 무한한......more
대순진리회같은 증산도계열은 정말..말이 안 나오더군요...ㅠ
확실히 저도 진화론은 이제 믿음의 차원을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과학적 사실이 이미 진화론이 진리임을 입증하고 있죠.
진화에 대한 연구가 최종적으로 끝나면, 이들은 이제 그동안 해결해야만 했으나 애써 무시해왔던 '어떻게 생명이 만들어졌는가'를 연구해야하겠죠.
정말 저건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아직은 숨이 턱 막히는 논제라고 생각합니다.
3. '점장이에게 열광하지 진짜 학자들에게는 열광하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과학시간에 배웠다고 사실인건 아니죠. 물론 진화론이 과학적 방법(가설 등)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 검증(화석?? 풋~~)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가설일 뿐입니다. 그러면 언제 검증되냐구요? 당연히 인간이 우연히 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때 검증되는것입니다. 고로 아직은 사실이 아닌거죠.
그렇기 때문에 1의 글에서의 "진화론을 믿습니까?" 는 말이 됩니다. 안되는게 아니라.... 제 생각으론 누군지 모르겠지만 에세이 쓴 분은 아직 가설인 진화론이 사실이다는 전제하에 이글을 쓴것같습니다. 글쓴이는 믿고 있는거죠 ..ㅋㅋ
그나저나 웰링턴의 '우주의 시작'과 '어떻게 생명이 만들어졌는가'를 고민해야할 필요성은 있는거죠. 하여간 윗글은 에세이라 그런지 로직이 없네요..
'반증되지 않은' 이론으로서의 진화론
2. 진화학의 법칙들은 지금도 실험실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선충류에 대한 연구를 찾아보시면 쉽겠네요.
3. 논리에 대해.
과학적 언어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동의를 숨은 전제로 가지는 사람들 간에 통하는 언어입니다. 그 숨은 전제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간에 대화가 통할리가 없는 거죠.